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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집, 이 짧은 시간 동안, 창비, 2004.

2008.9.17.

어제 정호승 시인의 시집을 샀다. 너는 시 쓰지 마라, 라고 듣는이는 아들인 듯한 어떤 시를 읽으면서 이 시인은, 시인으로서의 삶이 행복하지 않았나 궁금해졌다.

과외 시작 전 이십 분 정도 시간이 남아서 공원 벤치에 앉아 시집을 뒤적거리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예를 들자면, 소고기를 보고 슬프다는 생각을 이해해 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우스운 생각. 주어와 서술어 사이 숨어 있는 무수한 인과관계의 얽힘을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 마음 오롯이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내게 누구일까. 나는 참 우습다. 벌레에게 우주를 본다는 이성선 시인의 시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십 분 남짓한 사이에 내 발과 목을 타고 기어오르는 벌레들을 튕기고, 몇은 압사시켜 버렸다. 그 일은 내게 수단이 될 것이기 때문에 하고 싶지 않다는 주장을 불과 하루 전에 펼쳤으면서도 지금 하던 일보다 (오히려 나와 관련성은 더 떨어지면서도) 두 배의 돈을 준다는 곳으로 옮겨가기로 했다. 생각은 이런데 행동은 저렇다. 이렇게 우스운 나는 상당한 위선을 부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말의 한계. 글의 한계. 생각의 한계. 능력의 한계(이력서를 쓰며 절실히). 관계의 한계. 신뢰의 한계. 한 가지를 생각했는데 여러 가지들이 한꺼번에 스며들어 버렸다.

복잡한 생각 아래 펼쳐져 있던 시.


정호승,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나는 왜 아침 출근길에
구두에 질펀하게 오줌을 싸놓은
강아지도 한마리 용서하지 못하는가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구두를 신는 순간
새로 갈아 신은 양말에 축축하게
강아지의 오줌이 스며들 때
나는 왜 강아지를 향해
이 개새끼라고 소리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가
개나 사람이나 풀잎이나
생명의 무게는 다 똑같은 것이라고
산에 개를 데려왔다고 시비를 거는 사내와
멱살잡이까지 했던 내가
왜 강아지를 향해 구두를 내던지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는데
나는 한마리 강아지의 마음도 얻지 못하고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진실로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윤동주 시인은 늘 내게 말씀하시는데
나는 밥만 많이 먹고 강아지도 용서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인생의 순례자가 될 수 있을까
강아지는 이미 의자 밑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다
오늘도 강아지가 먼저 나를 용서할까봐 두려워라



정호승, '겨울부채를 부치며'

아들을 미워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일인 것처럼
아버지를 미워하는 일 또한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일이나니
아들아 겨울부채를 부치며
너의 분노의 불씨가 타오르지 않게 하라
너는 오늘도 아버지를 미워하느라 잠 못 이루고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고
술을 사러 외등이 켜진 새벽 골목길을
그림자도 떼어놓고 혼자 걸어가는구나
오늘 밤에는 눈이라도 내렸으면 좋겠다
내가 눈사람이 되어 너의 집 앞에
평생 동안 서 있었으면 좋겠다
너의 손을 잡고 마라도에서 바라본
수평선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면
지금쯤 너와 나 푸른 물고기가 되어
힘찬 고래의 뒤를 신나게 좇아갔을 텐데
아들아 너를 엄마도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일은 미안하다
살아갈수록 타오르는 분노의 더위는
고요히 겨울부채를 부치며 잠재워라
부디 아버지를 미워하는 일로 너의 일생이
응급실 복도에 누워 있지 않기를
어두운 법원의 복도를 걸어가지 않기를
나 다음에 너의 아들로 태어날 수 있다면
겨울부채를 부치며
가난한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는 아들이 되리니



어느 작가가 그랬다. 좋은 글이란, 읽는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내겐 이 시가 그랬다. 한 번 읽고 마음이 묵직해서 다신 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 시집을 펼칠 때마다 길을 걸을 때마다 버스 안에 앉아 있을 때마다 자꾸 이 시가 생각나서 결국 수첩에 옮겨 적었다. 이젠 괜찮다고 아무렇지 않다고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길 수차례인데, 불편하고 힘든 무수한 상황 앞에서 뚫린 구멍에 대한 생각이 지워지질 않아서, 그래서 손에 잡히지도 않는 지워지지도 않는, 또렷하지도 않은 미움과 아픔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나 보다.

마음이 다시금 뒤집어지고, 이 마음을 나는 또 한동안 움켜줘고 지낼 것 같다. 시간이 앞으로 더욱 흘러 만약에 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그 시간이 오게 되더라도, 쇠못 같은 마음을 먹어도, 그래도 결국은, 폭삭 내려앉고 마는, 나는 참 못났고, 나는 참 나쁘고, 나는 참 모질고, 나는 참 독하고, 그리고 나는 또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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