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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 산문집, 내 마음의 무늬, 황금부엉이, 2006.

'작가의 말'에서
ㅡ 많이 생각하고 오래 삭히어 빚어내는 한 줄의 고요하고 단정한 문장과 깊은 울림으로 숨 쉬는 행간의 세계는 모든 글 쓰는 자, 글 읽는 자들의 꿈일 것이다. (5쪽)

'시간의 얼굴'
ㅡ 유년기에서 청소년기로 넘어가던 시절, 몸과 마음에 성장통을 앓으며 맞이하는 사춘기를 곤혹스러움 없이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아이와 어른의, 현실과 환상의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경계에 자리하는 무정형의 그 무엇. 다가올 미래를 향한 지순하고 정결한 고백, 동경과 갈망으로 가득한 그들의 합창에 귀 기울여본 적이 있는가. 그들이 원하는 모든 좋은 것들, 아름다움, 그리고 '인간 존재라는 이 기괴한 사건' 속의 온갖 모순과 욕망의 씨앗이 이미 자신 속에 심어져 있는 것을 모르는 채로 그들은 유리꽃처럼 섬세하고 위태롭게 떨리는 감성으로 다만 스무 살을, 어른이 되기만을 기다린다. 스무 살의 자유, 스무 살의 희망, 스무 살의 절망, 스무 살의 고독을.
스무 살은 다른 세상을 향해 열리는 문이었다.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공상을 자주 하였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비밀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는 장 그르니에의 산문은 바로 이들의 소망이고 탄식이고 고백이 아니던가.
나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 자신의 꿈과 불확실한 미래에의 불안과 힘겨운 싸움을 치르고 있는 20대 초반의 내 아이들을 보며 역시 다를 바 없었던 나의 20대를 뒤늦게 이해한다. 그들은 그 고통과 방황이, 어쩌면 권태까지도 생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사랑이고 열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하루하루를 생의 첫날이나 마지막 날처럼 새롭게 치열하게 살고 싶다는 열망과 높은 목표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내일을 담보로 한 유예일 뿐, 남루하고 권태로운 일상의 되풀이임에 절망하며 방만하고 무위한 공상으로 날밤을 새우는 날들. 지식과 지혜를 구하는 마음에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하룻밤에 일생의 계획을 거창하게 세우지만 정작 하루의 계획은 실행하지 못하고 창조적인 삶, 불꽃처럼 뜨겁고 치열한 삶을 원하면서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젊음이 주체스러운 한편 준비 없이 맞을 미래에의 두려움, 중요한 시기에 시간을 낭비하고 소모하고 있다는 초조감에 쫓기는 시절. 그 나이를 이미 지난 사람들은 '희망과 가능성으로 푸르디푸른 아룸다움'이라 의심 없이 말하지만 삶의 실체는 잡히지 않는 채로 점차 생활인, 사회인으로서의 책무, 존재 의미를 찾고자 하는 안팎의 요구에 시달리는 20대의 생과 사랑은 얼마나 외로운가. (35-37쪽)

ㅡ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람마다 다 다른 그 결이 보인다. 나뭇잎의 흔들림에서 바람의 존재를 느끼듯 우리는 변화로써 시간의 흐름을 감지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제까지 나이가 변모시킨 우리들의 얼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낸 시간의 얼굴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43쪽)



2008.2.4.

문장도, 그 속의 정서도 참 좋았다. 눈으로만 읽기에는 아깝다. 맘 속으로 소리내어 곱씹으며 읽어도 한 장 한 장 넘기기가 아쉬웠다.

작가가 이 글을 쓴 나이는 오십대 후반, 환갑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이. 그럼에도 스무 살, 이십대라는 그 이름만으로 느끼는 온갖 감정이 뒤범벅된 그 마음을 이렇게도 생생하게 잘 읽어낼 수 있을까. 나는 내가 이미 거쳐 온 십대가 어떻다라고 규정지을 수 없고, 한복판에 서 있는 이십대 역시 나 자신부터가 너무 혼란스러워 뭐라 한정짓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이십대를 넘기고, 삼십대와 사십대를 넘기면서 보다 많은 연륜이 쌓이고 나면 그 나이는 이런 나이라고, 이런 마음이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는 걸까. 읽으면서 감사했다. 하고 싶었던 말을, 해 주길 바랐던 말을 조근조근 들은 기분이었다.

스무 살 생일이 됐을 때 인숙 언니는 편지로 스무 살은 싱그런 풋사과 내음이 나는 나이라고 그랬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스무 살의 출발선에서 그리 많이 달리지 않았음에도 내 풋사과는 바닥으로만 자꾸 굴러들어가서 한쪽이 곪아가는 것 같다. 싱그런 풋사과향 가득 맡고 나면 그 다음엔 빨갛게 익어야 하는데. 햇빛도 쬐고 바람도 맞고 맑은 비에 말갛게 씻으며 달콤하게 군침이 돌 만큼 익어야 하는데. 성숙해지려면 나는 아직도 한참 멀었다.

인숙 언니는 잘 지내고 있을까. 언니 생각이 자꾸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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