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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하루

이병률, 찬란

호흡을 가다듬는 시가 있다. 마음을 다독이는 시가 있다. 한 구절 한 단어, 마디마디 담긴 의미가 명료하게 해석되진 않아도, 행간에 자간에 마음으로 전해오는 미묘한 떨림이 마냥 좋은 시들이 있어 이따금 시를 찾는다. 

생각이라는 것 자체를 내려두고 싶은 순간들이 자주 생긴다. 그런 마음이 드는 것도 결국, 생각이라지만. 넋놓고 풍경을 보듯 정서의 풍경에 빠져 몇 번이고 곱씹는 시행의 울림에 위안받고 싶은 시간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시는, 소설 한 권만큼이나 내게 묵지근하다.

빛나는 단어는 내게 어색하다고 생각했었다. 언젠가부터 궁극의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았고, 하루를 딛는 일이 무거웠다. 하루를 잘 살아냈으니, 또다른 하루를 잘 맞이했으니,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했었다. 과거와 현재의 역동을 인정하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여긴 나는 지난날을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새날들이 찬란할 것이라는 믿음도 없었다. 순간이 중요했지 미래를 바라는 생각은 드물었다. 그래서 나는 미래에 힘을 싣기를 두려워하는지도 몰랐다. 아니다. 두려웠다.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어느날 '찬란'을 읽었다. 또다른 어느날 시가 떠올라 수첩에 옮겨 적었고, 틈틈이 소리내어 읽었다. '그래, 실은 모든 시간들이 찬란했어-.' 그런 낙관적인 믿음이 서는 것은 아니었는데 몇몇 시구들이 마음에 박혀 자주 생각이 났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하다는 말이, 왠지 모르게 위안이 되었다.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하다'는 말이, 마음을 다독였다. 생각이 먼저인지 언어가 먼저인지. 둘은 상호작용하는 것이라고 명쾌하게 정리를 한다지만 실은 그리 명쾌한 것은 아닌 것처럼. 마음을 다잡아도 쉽사리 입밖으로 나오지 않는 말들, 구체화된 언어로 상황을 견디어보려 해도 불쑥 헤집어놓는 생각들. 이것이, 저것이, 그 모두가 찬란하다 말하는 시인처럼 나도 어떤 말을, 그 모든 것에 대입한다면 내 감정도 그렇게 따라서 움직여줄까. 편안하다, 감사하다, 아름답다, 그리고 행복하다, 찬란하다, …….

시인이 찬란을 배웠듯이, 살아가면서 배워야 할 말이, 정서가, 내게는 참 많았다. 쉼을 배우고, 행복을 배우고, 찬란을 배우고. 그럼으로써 이 모든 것들을 당연히 그러했다고 수용할 수 있는. 수긍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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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 이병률 (2010)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하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처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하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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