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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아이들 곁, 2006~2015

고딩들이 거치는 시절의 단면, 내일도 담임은 울 삘이다

류연우 외 77인, 내일도 담임은 울 삘이다, 휴머니스트, 2012



 인터넷 서점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 '이 책을 구입하신 분들은 다른 책도 구입하셨습니다' 이런 목록에 있었거나, 혹은 검색창에 연한 글씨로 추천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클릭하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울 삘'이라는 말이 친숙했고, 공고 학생들이 썼다니 더 궁금했고, 우리 아이들이 생각나 함께 구입했다. 프리덤 라이터스 다이어리가 겹쳐지기도 했다. 


어느 공고 국어 선생님 세 분이 국어 시간에 시 쓰기 수업을 했고, 그렇게 모인 아이들의 창작시를 책으로 엮어 내었다. 뛰어난 문학적 표현력이 있지는 않다. 어딘지 허술하기도 한, 그렇지만 날것의 싱싱한 냄새가 나는 시들이다. 시가 정서의 스냅사진 같은 것이라면, 이 시들은 이 시대, 고딩들이 거치는 시절의 한 단면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들은 창작의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의 한 점이라고 보는 게 맞다. 시에 풀어놓은 경험과 정서의 한 점을 지나, 아이들은 성장했을 테고 그 점을 또다른 아이들이 뒤따르고 있을 테니까. 단면은 끊임없이 재생되고 변주될 테니까. 책에서 한 선생님이 '겉으로 드러난 공교육의 붕괴 현상을 주목하기 전에, 학생들의 시를 읽으면서 그들이 때로는 죄절을, 또 무엇인지 정확히 표현하기도 힘든 괴로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다(111쪽)'라고 말했던 것처럼, 아이들의 살아있는 목소리를 듣고 싶은 이들에게, 그리고 지난날 당신의 청춘을 생각한다면 아이들을 좀 더 너그러이 헤아릴 수 있지 않겠냐고 이야기하고픈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시들은, 지나온 시간에 대한 후회와 이율배반적인 어른들을 향한 원망이 가득하다. 그리고 삶에 얽혀 있는 관계망들, 가족, 반 친구들, 담임, 알바 등, 소박한 소재에 솔직한 정서를 풀어 내었다. 정서는 우리가 국어 수학을 배우듯이 교육되는 것이 아니다. 몸으로 경험하고서야 비로소 느끼고 깨닫는 정서, '겪은 것'이 많을수록 성장하는 아이들, 지금은 당췌 이해되지 않는 일들, 사람들뿐일지라도 시쓰기를 통해 열띤 사춘기를 질주하는 아이들이 한 번쯤 스스로의 삶을 돌아볼 수 있다면, 쳐다만 봐도 좋다. 잠시 멈출 줄도 알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일단은 재미있다. 노스 패딩만 입으면 나는 잘 나갈 수 있고, 나는 이 동네 배달계를 주름잡는 치킨집 배달부장이고, 우리 엄마 새뱃돈 맡아준다는 말 생판 거짓말 이런 표현들이 귀엽다. 또 한편으로는 인문고에서 공고로 전학가는 순간 나는 변하지 않았는데 엄마는 나를 다른 사람처럼 대한다는 이야기가, 학교는 교도소라서 탈영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막걸리를 드셔야 착해지는 아버지가 차라리 좋아서 매일 술을 드셨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들에 마음이 아팠다. 지나온 시간들을 돌이키고 싶다는 진심을 꺼내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막막함에 존재가 눌리는 아이들에게 나는 무엇을 줄 수 있을지 마음이 무거웠다. 그렇지만 무엇을 자꾸 주기 전에, 스스로 단면을 마주하고 스스로 느껴야 하는 것이 우선임을 내가 알고 있고, 아마 아이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개인차가 있듯이 저마다 다르게 마주할 결정적 시기에, 그래도 좀 더 일찍 부딪치기를 바라는 것은 내 욕심일 뿐일까. 아이를 충분히 기다려주는 것과, 후회를 조금이라도 덜 하도록 돕는 것, 그 사이에서 나는 고민스러웠다.

책을 보여주고 싶은 아이가 있다. 내가 바라는 마음이 아이에게도 전해질 수 있다면 가장 좋을 테고, 그렇지 않더라도 무엇이든, 재미도 좋고, 시가 말랑말랑할 수도 있군 이런 것도 좋고, 시 속 아이들의 어떤 정서라도 좋으니 무엇이든 스스로 마주하기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만으로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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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솔, 아빠와 막걸리

나는 아빠와 사이가 좋지 않다
남들이 부녀 사이로 절대 보지 않을 것이다
아빠와 집에 같이 있을 때도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다
하지만 서너 달에 한 번 아빠가
집에서 막걸리를 드신다
아빤 막걸리를 드시면 착해지신다
막걸리를 드시고 기분 좋게 취하신
아빠가 나에게 하는 말
우리 막내딸 시집가기 전에
내가 죽으면 안 되는데
그 한마디에
그동안 아빠에게 서운했던 모든 것들이 눈 녹 듯했다
하지만 그다음 날에
또다시 시작된 아빠와의 냉전
아빠가 막걸리를 드시면 좋겠다
막걸리를 드신 아빠는 불편하지가 않으니까


이정진, 진로

이것도 저것도 안 된다
앞날이 막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