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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희, 낮술 그러게요. 사는 게 무서워 비겁하게 도망다녀요. 아빠가 말했다. 그 말에 할머니가 갑자기 아빠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마치 열 살짜리 손자를 때리듯이. 이놈아. 뭐가 무서워. 아빠는 할머니에게 엉덩이를 맞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더 때려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 나이 되면 뭐가 제일 무서운지 알아? 계단이야. 계단. 할머니가 말했다. 그날 아빠의 머릿속에는 하루종일 할머니의 말이 맴돌았다. 나도 언젠가는 계단이 무서운 나이가 될..
자리 빛나는 글씨가 나오는 기념품 선풍기가 신기해서 한참 만지작거렸다. 사무실을 주로 지키는 나는 신기한 장난감으로 나름대로 요긴하게 쓸 것 같다. 졸릴 때마다 바람 맞아야지. 어제부터 카운트다운이 붙기 시작했고, 공기도 소리도 분주하다. 올해는 외진 자리여서 외롭겠다고 투정을 했는데, 문과 문 사이에 앉아 드나드는 얼굴들을 살피고 눈맞춤하는 자리가 이제는 제법 괜찮다. 사람도 짐도 공기도 바쁘게 지나는 풍경 그 사이에, 잘 머물고 있다. 피터, 폴 앤 ..
백석,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백석의 시가 기억나 찾아 옮겨 적었다. 시를 읽은 밤, 일을 조금 일찍 마쳤고 사람들과 얼굴 마주하고 밥을 먹고 웃고 노래하고 밤길을 오래 함께 걸었다. 잠이 오지 않아 방청소를 하고 창을 활짝 열고 매미소리 풀벌레 소리를 한참 들었다. 탓, 낱말에 온기가 돌았다. 밤의 소리와 풀냄새와 이런 저런 풍경과 사람과 마음 같은 것들을 어느 탓으로 여겨보았다. 문득, 이따금, 나는 나의 몫으로 살고 있을까, 내 자리가 어딜까, 이렇게 살아도 될까, 나는 무..
일기예보 위젯에 그리운 곳 날씨를 띄워놓고 가끔 살핀다. 여기는 이렇고, 거기는 그렇구나, 어느 날씨를 계절을 공기를 사람을. 제주는 내내 비가 없다. 덥고 습한 공기가 훅훅 올라올 그곳의 한여름을 생각한다. 아버지는 아프다고 한다. 아버지는 괜찮다고 한다. 아버지는 늘 그렇지 한다. 나는 식사를 묻는다. 나는 병원에 가셨느냐고 묻는다. 나는 다른 말을 할 줄 모른다. 나는 매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 하는 일이 없다. 나는 매번 울음을 참지만 들..
독서유랑, 이상의 집 공부 말고 이상을 스스로 마주했던 적이 언제였을까. 그리고 서촌을 느슨하게 걷는 것도 오랜만이다. 책읽는지하철의 독서유랑단에 참여했다. 7월은 시 유랑. 비가 촉촉한 날, 사람들과 마주앉아 시를 읽었다. 이상이 두 살부터 스무 해 가량 살았다던 집, 이상의 방으로 짐작되는 자리에 앉았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시를 읽고 나누고 캘리그라피를 배웠다. 사람들이 모이니 시집 한 권에서도 저마다 고른 시가 같고 또 달랐다. 하나의 시에서도 마음이 닿는..
달 그리고 시 "네게서는 달의 냄새가 난다.너는 걷고 걷고 걷는다."황인숙 시인의 '밤길'. 달의 냄새가 난다는 시를 생각했다. 달밤 꿈에 걸은 발자국에 돌길이 반은 모래가 되었다는 김옥봉의 한시도 생각했다. 가로등이 달 같은 밤. 자박자박 걷다 들어올 걸 그랬다. 글자를 아껴 감정을 담는 시를 닮고 싶은 날이 많았다. 시 같은 글을 동경했고 시 같은 마음을 동경했다. 말을 아껴야 하는 날. 감정을 아껴야 하는 날. 그리고 그러지 말아야 할 어느 날도 생각했다. ..
나는 쏟아지고 싶었으나 언 수도처럼 가난했단다 을지로에서 충무로로 꺾는 길, 시그니처타워 앞에는 뼈만 있는 물고기 동상이 있었다. 그앞을 지날 때마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진 둘리의 얼음별 대모험의 가시고기를 생각했다. 가시만 남아 물고기의 입으로 들어가면 몸 밖으로 바로 나오던 둘리 친구들과, 슬픈 눈을 꿈벅이던 물고기가 어른거렸다. "나는 쏟아지고 싶었으나언 수도처럼가난했단다"박연준의 시, 빙하기를 읽었다. 쏟아질 수 없어 가난했는지, 가난해서 쏟아질 수 없었는지 모른다. 결핍이 있어 허기진 것..
성대신문, 눈이 아닌 손으로 읽는 필사의 세계 아주 작게 필사모임을 이어갔다. 대학 신문에서 인터뷰를 했다. 존재가 미미해서 한참 망설이다가 답장을 보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주절주절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기자의 촘촘한 글에 작은 이야기가 붙었다. 몇 개의 질문 덕분에 나는 왜 좋아할까, 왜 고민할까, 무엇을 하고 싶을까, 자글자글 구르던 생각들을 오래 돌아봤다. 작은 점이라 생각하며 지냈는데, 점을 발견해주는 일이 참 고맙다. 성대신문, 눈이 아닌 손으로 읽는 필사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