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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조각 1.천천히 걸었다. 디어 마이 프렌즈의 희자 이모는 기억을 조금씩 놓아가면서 밤거리를 몇 시간이고 걸었다. 그렁거리는 눈으로 답답해, 걷고 싶어, 말하는 얼굴이 나는 시렸다. 발이 부르트도록 한없이 걷고 싶을 때는 한없이 깊은 밤이었고, 나는 겁이 많았다. 그래서 마음이 이따금 허했다. 2.문득, 비합리적인 경로를 권하는 지도 앱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이곳에서 저곳까지 가장 오래 빙 돌아가는 버스의 번호 같은 것. 비합리적인 시간을 이따금 갖고..
길고양이들이 놀러왔다. 사무실에 엄마와 아기 셋 길고양이들이 놀러왔다. 점심시간에 맞춰 마당에 들어와 밥을 먹고 나무도 탔다. 경계심이 적은 아기는 형제들 밥까지 혼자 다 먹고 아기들끼리 하악거리기도 하고 엄마는 밥도 양보하고 아기들을 살피다가 꾸벅꾸벅 졸았다. 가장 작은 아기는 높은 데 오르지 못하거나 담에서 뛰어내리지 못해 야옹거렸다. 사무실에는 저녁밥 먹으러 고양이 친구들이 또 놀러와 오도독 밥을 먹고 슬리퍼를 물고 다니며 뛰었다고 했다. 자그마한 친구들을 한참 보면..
쓸모 비행기에 오르고 내렸다. 먹먹해진 마음을 다스려보겠다고 정류장에 앉아 오고 가는 버스를 한참 쳐다보기만 했다. 아픈 일로 급히 오는 날들이 늘겠다는 생각이 서글펐다. 아픈 일들마저도 무게를 재어가며 가는 일을 고민할 어느 날들이 미웠다. 내가 미웠다. 아픈 사람과 아픈 사람이 섬 안의 섬으로, 섬 밖의 섬으로 산다. 어린 날은 당신이 밖에, 나는 안에 있었고 커서는 자리를 바꾸어 또 그리 살아간다. 두렵기도 했던, 완고했던 한 사람이었다. 나이가 조..
일상을 마주하기 달음질하지 않고 느슨하게 마주하는 오후 네 시. 시간이 풍경이 음악이 낯설다. 제천에서 여름을 다 살고 온 것 같았는데 선풍기를 끌어안아도 더운 서울의 여름이 아직 남았다. 어딘가 낯설다 낯설다 하며 그늘에 몸 붙이고 걸었다. 점심 때 몇 번씩 넋을 놓고 앉았던 카페는 잘 있었다. 한 달만인데도 이름을 기억하는 마음이 고마워서 자리잡고 앉았다. 친구 둘이 어제 내 이름에 적립을 하고 갔다는데, 사무실 식구일텐데 누굴까 누굴까 생각하는 마음이 간지러웠..
마음의 반동 바람을 쐬겠다고 일하는 곁에 쫄래쫄래 따라가 빵만 한아름 안고 왔다. 빵집에 같이 가자던 말이 여럿 있었고 말 뒤의 챙김이 나는 고맙다. 혼자 일하는 곁을, 고마운 이들이 말을 건네고 밥을 챙기고 때로는 잠시 머물러 앉기도 하며 채워주는 마음을 안다. 부풀었다 내려앉았다 조용히 숨고를 때에, 나누어먹고 눈웃음하고 어깨도 두드리며 오가는 마음의 반동이 약이 된다.2016.8.8.
윤성희, 낮술 그러게요. 사는 게 무서워 비겁하게 도망다녀요. 아빠가 말했다. 그 말에 할머니가 갑자기 아빠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마치 열 살짜리 손자를 때리듯이. 이놈아. 뭐가 무서워. 아빠는 할머니에게 엉덩이를 맞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더 때려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 나이 되면 뭐가 제일 무서운지 알아? 계단이야. 계단. 할머니가 말했다. 그날 아빠의 머릿속에는 하루종일 할머니의 말이 맴돌았다. 나도 언젠가는 계단이 무서운 나이가 될..
자리 빛나는 글씨가 나오는 기념품 선풍기가 신기해서 한참 만지작거렸다. 사무실을 주로 지키는 나는 신기한 장난감으로 나름대로 요긴하게 쓸 것 같다. 졸릴 때마다 바람 맞아야지. 어제부터 카운트다운이 붙기 시작했고, 공기도 소리도 분주하다. 올해는 외진 자리여서 외롭겠다고 투정을 했는데, 문과 문 사이에 앉아 드나드는 얼굴들을 살피고 눈맞춤하는 자리가 이제는 제법 괜찮다. 사람도 짐도 공기도 바쁘게 지나는 풍경 그 사이에, 잘 머물고 있다. 피터, 폴 앤 ..
백석,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백석의 시가 기억나 찾아 옮겨 적었다. 시를 읽은 밤, 일을 조금 일찍 마쳤고 사람들과 얼굴 마주하고 밥을 먹고 웃고 노래하고 밤길을 오래 함께 걸었다. 잠이 오지 않아 방청소를 하고 창을 활짝 열고 매미소리 풀벌레 소리를 한참 들었다. 탓, 낱말에 온기가 돌았다. 밤의 소리와 풀냄새와 이런 저런 풍경과 사람과 마음 같은 것들을 어느 탓으로 여겨보았다. 문득, 이따금, 나는 나의 몫으로 살고 있을까, 내 자리가 어딜까, 이렇게 살아도 될까, 나는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