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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길고양이들이 놀러왔다. 사무실에 엄마와 아기 셋 길고양이들이 놀러왔다. 점심시간에 맞춰 마당에 들어와 밥을 먹고 나무도 탔다. 경계심이 적은 아기는 형제들 밥까지 혼자 다 먹고 아기들끼리 하악거리기도 하고 엄마는 밥도 양보하고 아기들을 살피다가 꾸벅꾸벅 졸았다. 가장 작은 아기는 높은 데 오르지 못하거나 담에서 뛰어내리지 못해 야옹거렸다. 사무실에는 저녁밥 먹으러 고양이 친구들이 또 놀러와 오도독 밥을 먹고 슬리퍼를 물고 다니며 뛰었다고 했다. 자그마한 친구들을 한참 보면..
윤성희, 낮술 그러게요. 사는 게 무서워 비겁하게 도망다녀요. 아빠가 말했다. 그 말에 할머니가 갑자기 아빠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마치 열 살짜리 손자를 때리듯이. 이놈아. 뭐가 무서워. 아빠는 할머니에게 엉덩이를 맞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더 때려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 나이 되면 뭐가 제일 무서운지 알아? 계단이야. 계단. 할머니가 말했다. 그날 아빠의 머릿속에는 하루종일 할머니의 말이 맴돌았다. 나도 언젠가는 계단이 무서운 나이가 될..
상실을 생각했다. 1. 권여선의 소설을 챙기고 나왔다. 첫 문장은 그랬다. "산다는 게 참 끔찍하다. 그렇지 않니?" 2.데몰리션을 보고 왔다. 상실의 한가운데에서, 상실을 말하지 않지만 실은 모두 상실이었던 이야기. 상실을 이렇게도 그릴 수 있을까. 가끔은 피식 웃기도 하며, 덤덤하게 상실을 마주했다. 삶이 무너지는 증상. 그리고 삶이 무너지지 않으려는 증상을 생각했다.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이해한다 알고 있었던, 이제는 이해할 수 있는..
상투적이지만 상투적이지만 눈이 펄펄 오는 어느 날 설국을 읽어야겠다고 책을 샀다. 상투라는 것이, 결국은 보편적인 정서에서 온 것일 테니. 상투적으로 눈이 펄펄 오는 날 설국을 가방에 담았다. 눈오는 날은 손편지지 하며 엽서를 담았다. 봄이 온다. 때를 놓쳐 혼자 겨울을 잡아두고 설국을 읽는다. 편지를 쓴다. 눈길을 걷듯 마른길을 자박자박 걷는다. 상투적인 표현이 그리운 날이 있었다. 2016.2.16.
김숨, 바느질 하는 여자 필사모임 여섯째 날. 책 이야기 생각 이야기 사람 이야기 고민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는 시간이 좋다. 보통 끝나던 시간보다 한 시간을 훌쩍 넘겼다. 긴 이야기에 못 맺은 생각을 혼자 잇다가 두 정거장을 네 정거장 지나서 내렸다. 지나온 만큼 걸었다. 봄이 오셨다는데 아직은 툭툭 터진 손이 아렸다. 베껴쓴 이야기에 사람이 생각나서 속도 조금은 아렸다. 만약에, 조선후기에 내가 태어났다면 삯바느질하고 이야기책 필사하며 생계를 이었을 거라고 혼자 생각했던..
김진규, 달을 먹다 2008.“너는 나로 인해 죽는다.”계절에 따라 크게 네 장으로 나뉘어 있고, 계절과 사람들 마음의 얽힘에 대한 기록으로 보아야 할까, 계절 이야기를 모토로 시작하여 그 안에는 여러 인물들의 목소리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 종횡으로 얽힌 여러 인물들이 자기의 목소리를 내고 있음에도 이 소설이 일관성을 갖고 있는 것은, “너는 나로 인해”라는 책무감으로 스스로를 옥죄고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옛사람들 삶의 흔적이 새로웠고, 수식이 많은 문장이지..
죽은 시인의 사회 2009.9.독서치료 과제로 한 인물의 인생경험이 발달단계의 갈등을 어떻게 반영하는지 서술하라는 문제를 보고 토드 앤더슨이 생각났다. 우연히 ocn에서 영화로 접하고, 인터넷에서 찾은 동영상도, 서점에서 산 책도 모두 열댓 번은 넘게 본 것 같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받은 느낌을 가지고 중학교 때 졸업생 편지글을 읽었고, 고등학교 때 독후감 발표대회에서 말하고, 대학교 일학년 때도 교양과목 레포트에 롤모델로 키팅 선생님을 적었다. 무엇을 손에 쥐어..
성석제,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2005.황만근이 없어졌다. 있으나마나 한 존재이면서 있었던 그가 사라지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의 부재를 알게 되었다. 그는 있으나마나 한 존재이면서도 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소설은 이렇게 어느 날 아침, 황만근이라는 한 사내의 부재에서 시작된다. 황만근은 마을 사람들에게 바보 천치라고 손가락질 받는 인물이다. 어수룩한 외모에 어수룩한 말투, 겉모습만 봐도 영락없는 바보이다. 한 집에 사는 어머니와 아..